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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방블리입니다♡
역사탐구/국내역사

백범일지(백범 김구, 백범일지 독후감)

by 방블리♥ 2019. 12. 7.

안녕하세요! 학부시절 역사를 전공한 방블리입니다!

일상생활을 포스팅하면서 역사에 관련된 인물이나 주제등도 포스팅할 예정이에요~ 

많이 들어와서 보고 같이 알아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포스팅은

"돌베게 출판사의 백범일지" 읽고 감명받고 독후감식으로 작성해 보았습니다.

 

본론에 앞서 김구선생님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겠습니다.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1876년 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통일운동가, 정치인이다. 의열단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을 역임하였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위키백과 참조-

 

 대한민국의 대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사상가로 그의 생애를 생생히 기록한 '백범일지'는 모두 한번씩은 들어보았지만 제대로 읽어보는 기회는 많이 없었을거라고 생각듭니다!

포스팅을 보시고 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의 확고한 정신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함께 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간략하게 제가 감명받은부분을 적어보았습니다!

 

상권의 시작은 두 아들에게 알리는 글로부터 시작하여 유년 시절의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었다. 백범의 조상은 김자점의 방계 후손으로 김자점이 반역죄를 저질러 온 집안이 화를 입을 때 경기도 고양군으로 피신했다가 그곳 역시 서울과 가까운 지방이라 멀리 해주읍의 백운방 텃골(지금의 북한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팔봉산 양가봉 밑으로 옮겨 숨어 살았다고 한다. 고로 소위 양반의 자손이지만 역적의 방계 후손이라 일반 양인의 신분으로 속여 숨어 산 것이다. 백범의 유년 시절 ‘상놈’이라 차별받고 힘들었을 모습이 떠올라 뭉클해 졌다.

 

 백범은 ‘병자수호조규’ 흔히 강화도 조약의 체결시기인 1876년 7월 11일에 태어났다. 그리고 서너 살 때에 천연두를 앓았는데, 고름이 돋을 쯤에 어머니가 그 전에 민간에서 해오던 종기 치료 방식처럼 대나무 침으로 따고 고름을 짜내는 바람에 얼굴에 마마자국이 많이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천연두는 마마로 불리며 아주 무서운 질병이었는데 백범이 살아남은 것은 운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천연두를 이겨낸 백범은 잘 성장하여 한글과 한문을 익혔는데 타락한 과거를 보고 실망하여 아버지가 주신 관상서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이 중에서 『상서』라는 책을 보았다고 하며 마음에 들었다는 구절을 적어 놓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상이 좋은 것은 몸 좋은 것만 못하고 相好不如身好

몸이 좋은 것은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身好不如心好

 

이 구절은 상당히 유명한 구절이지만,『백범일지』를 처음 정독하는 나에게, 직장생활을 하고있는 나 자신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복학후에 나의 인생이나 행동, 인간관계에 대해 몸이나 정신적으로 좌절감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그 것은 자신의 마음가짐의 차이 일 뿐이라는 것을 느꼈다. 겉이 아무리 화려해도 마음이 외롭고 슬프다면 모두 필요없는 것고, 자신의 마음을 다잡을수 있다면 상과 몸도 모두 자연히 따라옴을 배울수 있었다.

백범은 18살에 동학의 사상에 심취하여 가입, 어린 나이에 접주가 되어 팔봉접주 혹은 ‘아기접주’라 불렸다. 솔직히 백범의 동학 활동에 대해 ‘근현대사의 이해’ 수업을 듣기 전까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백범은 해주성 전투 등에 참여하기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는데 이러한 행동력과 실패가 후에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지도하는 주석으로서의 역량을 키워주는 경험이 아니었나 싶다.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부터는 계속 수업시간이나 책에서 많이 배운 내용들이었다.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도산 안창호에게 문지기를 자청하였다가 경무국장이 되었던 일, 신채호와의 마찰, 등 많은 일들이 상해 임시정부 시절에 일어났다.

내가 가장 관심있게 읽었던 부분은 한인 애국단 창단 및 활동이었다. 본문에 의하면 재무부장 및 민단장을 겸임하고 있을 때 한 청년이 찾아왔다고 하였다. 그는 “저는 일본에서 온 노동자입니다. 상해에 가정부(일본 사람들이 임시정부를 지칭하는 말)가 있다는 말을 듣고 독립운동을 하고 싶어 며칠 전에 상해에 왔습니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전차검표원에게 임시정부가 있는 곳을 물어보니 보경리 4호로 찾아가 보라고 해서 이렇게 왔습니다. 이름은 이봉창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 것이 이봉창 의사와 백범의 첫 만남이었다고 한다. 백범이 이봉창 의사에게 이렇게 까지 찾아온 포부를 물으니 이봉창 의사는 “제 나이 서른입니다. 앞으로 30년을 더 산다 한들 늙은 생활이 과거 반생동안 방랑생활에서 맛본 것보다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육신의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으니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도모하고 싶습니다. 상해에 온 목적도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 싶어서입니다.” 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본디 이봉창 의사는 서울 출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철저히 일본인으로 살고자 노력했으며 조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철저하게 피했다고 수기에 적을 정도였다. 이러한 그가 2년 만에 어리석은 생각을 하였다며 뉘우치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그 전처럼 일본인 행세를 하며 살았다면 정말 육체적 쾌락은 계속해서 유지해 나갈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살신성인의 자세로 그의 한 몸을 내던졌다. 저 춘추시대 공자가 한 말들 중에 “진정 天意가 부귀에 있다면 백이와 숙제의 비참한 아사는 무엇이고 도척의 부귀영화는 무엇인가. 진정으로 天意가 부귀에 있다면 마부로 태어나도 여한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天意는 부귀가 아니라 후대에 의로운 이름으로 남는 것 후세에 칭송받는 것이 진정한 天意이다. 나는 道를 행하고 德을 쌓겠다.” 라고 하였다. 그는 이미 而立의 나이에 공자의 말을 깨달았을까? 나는 이봉창 의사가 최소한 부귀는 잊었으며, 그 칭송을 얻기 보다는 스스로 무언가 핍박받는 민족을 위해 무엇 하나라도 하고자 생각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일지라도. 실제로 그의 의거로 전세계가 놀라 주목하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의거는, 그는 우리 가슴속에서 영원히 살아있다. 이봉창 의사 뿐만 아니라 윤봉길 의사도 정말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아들에게 남긴 편지는 정말 그의 웅대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국가보훈처 참조

일제의 중국 침략으로 상해, 남경 등 주요 도시가 공략 당하자 피난하며 근근히 임시정부를 유지해나간다. 그러다 곡식 값이 싸 식량을 조달하기 쉬웠던 호남성 장사로 갔을 때 조선혁명당 중앙위원 출신의 이운환이 저격하여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등의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저격 등의 생명위협을 받으면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고 그것을 지켜나갔다. 대나무는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백범은 이러한 성질을 가진 흔히 대쪽같은 인물이 아닐까?

백범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미군 등과 협력하여 1945년 9월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던 중 8월 15일에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백범은 무조건 기뻐하기 보다는 국내 진공작전에 쏟았던 정성이 아깝고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 걱정하였다. 그는 독립 후 정국에 있어서 민족의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없을 미래를 이미 내다보고 걱정했던 것이다. ‘만약 국내 진공작전이 시작되고 국내 진격에 성공했다면 우리의 현대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국사를 배웠던 은사님께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이것 이었다. 역사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만 이루어졌다면 현재의 동북공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분단의 아픔은 없었을 텐데.

 

「나의 소원」중에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학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백범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했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아니라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 그렇기에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 화합된 힘으로 이기심을 배척하고 국토에 춘풍이 도래하기를 빌었다.

 

백범은 혼란한 격동기의 시대 속에 부유하지 않은 몰락 양반층에서 ‘김창수’를 이름을 가지고 태어나 18세에 감오농민전쟁에 참가해서 해주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활동, 나와 비슷한 나이에 이미 봉양학교를 설입하여 학교장이 되었고, 신민회, 임시정부 등 많은 경험과 많은 고난과 많은 일들을 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존경받아 마땅한 민족주의자 백범은 사람들에게 임시정부 주석, 독립운동가의 이미지만 전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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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입니다. 마지막에 개인적인 느낀점은 포스팅하기 살짝 부끄러워서 올리지못하겟네요ㅎㅎ 지금이라도 꼭 시간내어 읽어주세요... 정말 역사적 지식뿐아니라 백범김구선생님의 깊은 사상과 문체를 배울수 있답니다!

이번 포스팅은 여기서 마치고, 다음번에는 더욱 알찬내용으로 역사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참고로 2019년 2월 28일에 반영된 tvN '어쩌다 어른 2019'에서 백범 김구의 마지막 소원 '세계 평화의 중심' 설민석 강사님이 김구선생님에 대해 설명해주시는 영상도  매우 유익하니 꼭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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